
1년 동안 인턴으로 일했던 약국을 떠나게 됐다. 학생으로 처음 들어왔던 약국을, 인턴 기간을 거쳐 이제는 약사가 되어 (잠시) 떠나게 되었다.
처음 인턴을 시작했을 때는 대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드디어 현장에서 쓰게 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학교에서 배운 ‘약’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약사'라는 직업 자체를 배워가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약사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보다 사람에게 잘 설명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직업이었다.
약사는 약 지식뿐 아니라 계속 바뀌는 가이드라인과 정부 지침, 시장 상황까지 계속 업데이트하며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약사는 하루 8시간을 서서 일할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한 직업이었고,
약사는 의사가 처방전을 제대로 작성했는지 더블체킹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확인할 사항이 생기면 좀처럼 받지 않는 전화를 끝없이 걸어야 하는 직업이기도 했다.
약사는 디스펜싱을 하면서, 전화도 받으며, 바로 앞에서 재촉하는 환자의 질문에 답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상하지 못한 환자의 무리한 요구나 감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친절하고 프로페셔널해야 하는 감정 노동의 직업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며 보낸 시간 속에서, 힘든 순간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바쁜 순간에도 서로를 챙기는 마음,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하루의 분위기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도 배웠다.
인생에서 평생 갈지도 모를 친구를 만날 기회는 많지 않은데, 그 소중한 기회 중 하나를 아마 내 인턴 기간에 쓰게 된 것 같다. 단순히 친한 동료를 넘어,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일하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많은 걸 깨닫게 해준 친구였고, 그 친구가 있으면 괜히 화가 날 상황도 조금은 웃어넘길 수 있었고, 힘들었던 하루도 생각보다 덜 힘들게 지나가곤 했다 (남자 아니고 여자임).
그래서인지 그 친구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한 5년 사귄 남자친구한테 차인 기분만큼 슬펐다ㅠ (나 데려가라며 구질구질 매달렸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 때문에 회사를 다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영어권 문화에서 일하며 그동안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항상 내 영어 실력에 유독 엄격했고, 잘한 순간보다 부족했던 부분을 더 오래 곱씹는 편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영어를 누군가 듣고 있다고 느끼면 괜히 더 위축되고 실수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파머시스트 인차지로 일하던 주말이 오히려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환자가 몰려 정신없는 순간에도 이상할 만큼 침착했고, 마음이 조급해지기보다는 해야 할 일들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도움을 구할 시니어 약사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쩌면 내 부족한 영어를 누군가 옆에서 듣고 있을 거라는 부담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환자들과 대화하게 되었고, 실수는 줄어들었으며 복약 상담도 평소보다 더 길고 자세하게 하게 되었다. 결국 나를 가장 위축시키던 건 영어가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이었는지도 모른다
인턴 시험이 끝난 후에는 분명 후련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공허했다.
지난 4년 동안은 그저 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해서 약사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달려왔고 그러면 얼마나 기쁠까 생각했는데, 막상 약사가 되고 나니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당장 한국 시험을 준비하고 싶었다. 한국 약사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가만히 있으면 밀려올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낄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역시 뼜속까지 한국인ㅠㅋ)
그래서 잠깐 멈추기로 했다.
다시 해야 하는 것들을 해나가는 삶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음 한켠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는 시간을 잠깐 가져보기로 했다.
나이도 꽤 먹었고, 두 번의 대학 생활과 수험 생활,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까지 지나왔는데도 아직도 새로운 나를 발견해가고 있다는 게 묘하게 낯설고 신기했다. 여러 시간을 지나왔는데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고, 생각보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고, 여전히 방향을 찾는 중인 사람인 것이 싫으면서도 좋다.
그래도 돌아보면, 예전보다 조금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된 것 같기는 하다.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는 화나는 일이 있으면 집에 가는 날엔 눈물 찔끔 흘리면서 일기 썼는데,
이제는 약국에서 환자들이 화나게 하는 일이 있으면 집에 가면서 아 Cㅣ바새키들 이러면서 바로 데스노트 쓰고 끝낼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ㅎ
나는 그대로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이것 또한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변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분명 조금은 단단해졌을지도 모른다.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잘 보낸 1년이었다.
학생이었던 내가 약사가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제 2026년 빙고보드를 하나씩 채우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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